한국을 대표하는 갤러리 중 한 곳인 갤러리 현대에서 개관 50주년을 맞아 '인물, 초상, 그리고 사람'이라는 전시를 열었다. 이 전시가 궁금했던 이유가 몇 가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이 문장 때문이었다.
'전람회에 진열된 김군의 그림은 사진이 동경으로부터 도착하얏스나 녀인의 벌거벗은 그림인 고로 사진으로 게재치 못함'
도쿄미술학교에서 최우등으로 졸업한 김관호 화가가 당대 일본 최고의 미술 행사였던 문부성 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했으나, 나체화란 이유로 신문 <매일 신보>에 게재되지 못했다. 한국 최초의 근대 누드화라고 하는, 이 그림이 얼마나 유별났길래?
궁금증이 커졌다.
경복궁 동편에 위치한 갤러리 현대. 마침 청명한 날씨라서 기분 좋게 걸었다.
도슨트가 시작하는 오후 3시에 맞춰 입장.
뭔가 기대(?) 했던 분들에게는 실망스러울 수 있으나, 실제로 본 결과 색감이 상당히 아름다웠다. 대동강변에서 멱을 감는 두 여인의 뒷모습인데, 불그스름한 빛을 통해 해 질 녘이란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관능미보다는 숭고미에 가까웠다.
이 그림을 보는 순간, 자연스레 고갱이 그린 타히티의 여인들이 떠올랐다.
파란 하늘, 황토색을 띤 땅, 이국적으로 느껴지는 식물 그리고 햇볕에 바삭 그을린 인물들의 모습까지. 마침 도슨트도 "이 그림보고 떠오르는 화가 없으신가요?"라고 물었고, 고갱이라고 답하자 미소를 지었다.
구글에서 슥- 찾아봤는데, 이 그림과 특히 뉘앙스가 비슷하게 느껴진다.
'양색시'란 단어를 찾아보니 미군 병사를 상대로 몸을 파는 여자를 이르던 말이라고 한다. 당시 시대를 봤을 때 모두가 한복을 입는 상황에서 짙은 화장에 짧은 치마를 입고 다니는 이들은 단연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그녀들 뒤 편에는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이들의 모습이 묘사됐고, 이응노 화백은 이들의 선입견을 표현하고자 그림을 그렸다.
이 때나 요즘이나 소수를 고정관념의 시선으로 살펴보는 이들이 참 많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 이전에 이인성 화백의 그림을 보고 폴 고갱이 떠올랐다면, 이 그림을 보는 순간에도 평소 좋아하던 어떤 화가가 떠올랐기 때문.
바로 마티스였다.
화사한 색채 (하지만 너무 아름답고 조화로운)와 인물의 곡선을 살리는 묘사를 보고 단연 그가 떠올랐다. 이번에는 도슨트가 질문하지 않아서 혼자서 추측하고 좋아라(?) 했다.
혹시 다른 화가가 떠오르는 분들 있다면 알려주세요.
그림을 정식으로 배워본 적 없던 그이기에 그만의 특징이 있다. 평상시 황소 그림을 선호하지 않지만, 이 그림은 유난히 인상 깊어서 사진으로 담아두었다.
천경자 화백은 두 번 결혼했다고 한다. 두 결혼 모두 평범하지는 않았다.
첫 번째 결혼은 도쿄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티켓을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그녀에게 티켓을 건네준 남자와 했으나 (오랫동안 잘 만났으면 영화가 될 뻔도 했겠다) 헤어졌고, 두 번째 결혼의 상대는 유부남이었다. 그림에서 묘사된 모습이 두 번째 남편과의 삶이다.
남자는 누워서 자고 있고, 아기를 안아보며 그를 바라보는 한 여인의 모습. 언뜻 아름다워 보이지만, 슬픔이 짙게 배어 있다. 천경자 화백은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내 온몸 구석구석엔 거부할 수 없는 숙명적인 여인의 한이 서려 있나 봐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는 지워지지 않아요.
풍경화보다 인물화가 매력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 이유는 스토리가 더 풍부하게 담겼기 때문이다. 한 폭에 담겨진 인물들을 통해 그들의 역사와 시대의 맥락들을 알 수 있었던 전시였다.
그렇기 때문에 도슨트 시작하기 삼십 분 전에 슥- 보고, 도슨트를 들으며 다시 감상하시길 추천합니다.
2020년 3월 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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