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두근거리며 읽었던 경영인 자서전이다. 이만큼 즐겁게 읽었던 기억은 7년 전 토니 셰이의 <딜리버링 해피니스> 정도가 떠오른다. 토니 셰이가 사업 자체(어렸을 적 했던 사업 중에는 지렁이 농장, 크리스마드 카드 판매 등도 있었다)에 미친 사람이었다면, 필 나이트는 오로지 신발에 미친 사람이었다. 오죽하면 제목도 슈독(Shoe Dog)으로 지었겠는가.
책을 읽으면 사업이 얼마나 재밌고 또 괴로운지 알게 된다. 누군가에게는 마약 이상의 쾌락과 고통을 안겨주리라. 다소 두텁지만 상당히 몰입도가 높고 마지막엔 뭉클한 감동까지 안겨준다. 그 중 인상 깊었던 부분들을 키워드로 정리해봤다.
1. 일본 운동화 수입으로 시작
필 나이트는 오리건대학교를 다녔던 시절 육상선수였다. 일찌감치 위대한 선수가 되지 않을 것이라 스스로 판단했던 그는 이 세계와 공감할 다른 방법을 찾게 된다. 그것은 스탠포드 MBA 에서 기업가 정신 수업 과제로 제출했던 신발 사업이었다. 일본 카메라가 어느새 독일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러닝화 역시 시장을 장악할 것이라는 가설을 던진다. 그래서 직접 고베까지 건너가 오니쓰카 타이거(아식스)를 미국에 수입하기 시작한다. 그 때는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1960년대 초반이었다. 나이키의 전신은 일본 운동화 수입회사인 블루 리본 스포츠(Blue Ribbon Sports)였다.
2. 안정적 현금 흐름보다는 재투자
블루리본 스포츠(나이키의 전신)가 대출을 더이상 받을 수 없어 재정 상황이 최악에 다다랐을 때, 그는 CPA에 합격한 뒤 회계법인(PWC)까지 다니며 자기 자본을 확보한다. 그는 회계사로서 누구보다도 재무제표에 대해 잘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금 흐름 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부채로 인한 위기들을 상장 전까지 버텨낸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성장을 위한 재투자였다.
(+ 그가 회계사가 된 것은 신의 한수였다. 라이센스와 회계법인 경험을 통해 포틀랜드 주립대에서 조교수까지 하고, 회계 수업 시간에 제자에서 부인이 된 페니를 만난다.)
3. 동지들과 함께 했던 내향적인 사업가
애플 그리고 마이크로소프트와 달리, 나이키의 창업자는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아마도 <슈독>을 통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까.
그는 스스로도 내향적인 성격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람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것 만큼은 적극적이었다. 오늘날 나이키가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에는 바우어만 코치, 존슨, 우델, 스트라세, 헤이즈와 같은 동지들의 역할이 컸다. 그들은 각자 약점이 있었지만 나이키 안에서는 자신만의 빛을 내며 일할 수 있었다. 사실 필 나이트가 이들에게 항상 나이스하게 대한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말도 안되는 롤을 부여하며 일을 시켰지만 이들은 끝내 해냈다.
<슈독>을 통해 얻은 단 한 가지를 꼽는다면 단연 이들의 팀워크와 존버 정신이다.
4. 오로지 제품력
공동 창업자인 바우어만은 미국의 전설적인 육상 코치다. (필 나이트의 대학생 시절 스승이기도 했다) 그 역시 슈독이기 때문에 오니쓰카 타이거를 수입했던 시절부터 스스로 각종 실험을 거쳐 새로운 신발들을 제안했다. 필 나이트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최소 6마일(약 10km)을 뛰었다. 또한 프리 폰테인 같은 뛰어난 선수를 동경하며 육상 경기를 관람하곤 했다.
나이키는 이런 사람들이 만든 신발이다. 지금에야 마케팅이 유명하지만, 그때는 오로지 제품력이었다. 선수들은 이 신발을 신고 승리했다.
5. 꿈자리와 경쟁사 직원의 이름을 통해 탄생한 네이밍
오니쓰카 타이거를 수입하던 블루리본 스포츠에서 독자적인 라인업을 구축하는 회사로 변신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이름이 필요했다. 필 나이트가 떠올린 이름은 '팔콘'과 같은 동물이었다. (퓨마의 영향을 받았나?) 어느날 동료 존슨은 자신의 꿈에 승리의 여신이 나타났다며 니케(NIKE)를 제안한다. 나이키란 이름은 그렇게 탄생했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로고 중 하나인 나이키 스우시는 필 나이트가 재직하던 학교의 디자인과 학생에게 30달러를 주고 만들었다. 거창한 요구는 없었다. 단지 동적으로 보이도록 만들어달라고 했단다.
더 흥미로운 에피소드는 코르테즈 네이밍이다.
오니쓰카는 우리에게 우리에게 이 신발의 상표명에 대해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말해달라고 했다. 바우어만 코치는 1968년 멕시코시티에서 열리는 올림픽을 축원하는 의미에서 '아즈텍'을 제안했다. 나도 마음에 들었고, 오니쓰까에서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아즈텍은 바로 이렇게 탄생했다.
그런데 아디다스가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위협했다. 아디다스는 멕시코시티 올림픽을 겨냥해 트랙 스파이크의 일종인 '아즈테카 골드'라는 신제품을 이미 출시한 터였다. (중략) 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는 차를 몰고 바우어만 코치에게 가서 상황을 충분히 설명했다. 우리는 넓은 포치에 앉아 말없이 강을 내려다보았다. 그날따라 강물은 은빛 구두끈처럼 반짝였다. 바우어만 코치는 야구 모자를 벗더니 다시 썼다. 그러고는 얼굴을 문지르며 물었다.
"아즈텍을 가지고 시비 거는 녀석 이름이 뭐라고 했지?" "코르테즈라고 하던데요."
그러자 바우어만 코치는 투덜거리듯 말했다. "좋아, 이번 제품은 코르테즈라고 하지."
(p.163-164)
6. "어머니는 우리의 첫 번째 스승이다."
필 나이트의 정신적 지주는 어머니였다.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는 그의 사업을 반대했지만, 어머니는 끊임없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필 나이트가 처음 오니쓰가 타이거를 가져왔을 때 (그때는 집 지하실이 사무실이자 창고였다)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귀에 들릴 만큼 큰 소리로 신발 한 켤레를 구매하겠다고 외쳤다. 그 한 마디에 그는 힘을 얻는다. 이에 대한 감사로 훗날 짓게 된 오리건 대학교 체육시설 입구 명판에 이 문장을 새기기로 결심한다.
"어머니는 우리의 첫 번째 스승이다."
7.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을 우연히 만난 에피소드
2007년 영화 <버킷리스트>를 보고 나오던 중, 우연히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을 만난다. 그들이 대화를 나눌 때, 누군가 뒤에서 "버핏과 게이츠는 알겠는데 저 남자는 누구지?"라는 소리를 듣고 웃는다. 버크셔 헤서웨이와 마이크로소프트보다 유명한 브랜드를 만든 이 남자는 그 순간 일종의 자격지심에 빠진다. 당시 그는 100억 달러를 가진 엄청난 부자였으나, 버핏과 게이츠는 자신보다 대여섯 배 정도 자산이 많다는 생각에 빠지며 그들은 모든 것을 이뤘을 것이기에 버킷 리스트마저 없을 것이라는 추측까지 한다.
(+ 대화를 나누며 버핏과 게이츠는 각자 자신의 신발을 흘깃거리며 미안해 하는 표정을 지었단다. 굳이 미안해 했을 정도면 아디다스나 오니쓰카 타이거 였을지도?)
8. 영화 제작의 가능성
책을 읽다 보면 왠지 영화로 만들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각 에피소드에 대한 상황 묘사를 입체적으로 했다. 다독가로 유명한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마저 그를 뛰어난 스토리 텔러라고 표현했을 정도.
구글링을 해보니, 마침 넷플릭스가 영화로 제작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는 기사(2018년 7월)를 발견했다. 필 나이트 역은 아담 드라이버, 바우어먼 코치는 <위플래쉬>의 JK 시몬스가 어울린다는 기사가 있기도 했다. <소셜 네트워크>와 <머니볼>의 아론 소킨이 각본을 쓴다면 참 좋겠다.
9. 유일한 아쉬운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이 있다. 5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 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나이키의 상장(1980년)까지다. 그 이후에도 수많은 역사 (에어 조던의 탄생 등)가 있을텐데 말이다! 참고로 에어 조던에 대한 이야기는 넷플릭스의 <앱스트랙트 시즌 1, 팅커 햇필드> 편을 보시길. 에어 조던을 만든 디자이너에 대한 40분 가량의 다큐멘터리로 슈독에서 느꼈던 갈증을 채워줄 것이다.
10. 강렬한 말과 문장들
기억에 남기고 싶은 문장들이 많아 열심히 옮겨 적었다.
- "산을 움직이려 하는 자는 작은 돌을 들어내는 일로 시작하느니라." (p.77)
- 그런데 신발을 파는 일은 왜 좋아하는 것일까? 그 일은 단순히 제품을 파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는 달리기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매일 밖에 나가 몇 마일씩 달리면, 세상은 더 좋은 곳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내가 파는 신발이 달리기에 더 없이 좋은 신발이라고 믿었다. 사람들은 내 말을 듣고 나의 믿음에 공감했다. 믿음, 무엇보다도 믿음이 중요했다. (p.85-86)
- 바우어만 코치는 올림픽에 참가하는 엘리트 선수만 스포츠맨인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늘 가슴에 품고 있었다. "우리 모두가 스포츠맨이지. 우리에게 신체가 있는 한, 우리는 스포츠맨이야." (p.132)
- 협상의 기본 원칙은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서로 하나가 되기 위해서 자기가 무엇을 얻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p.188)
- 당신이 누군가에게 갖는 감정을 알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그 사람에게 바로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이다. (p.191)
- 나는 계속 웃다가 이렇게 말했다. "능력 밖의 일이라고? 우리 모두 능력 밖의 일을 하고 있어. 그것도 엄청나게 밖에 있는 일을 말이야!" (p.364)
- 나는 그들을 붙잡지 않고 풀어주었다. 그들이 실수를 해도 내버려두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런 식으로 대해주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p.432)
- 어쩌면 의욕 상실증을 치유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일을 더 열심히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p.475)
- 애초에 겁쟁이들은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약한 사람들은 도중에 죽었고, 이렇게 해서 살아남은 자들이 바로 우리 오리건 사람들이다. 신사숙녀 여러분, 바로 우리들입니다. (p.504)
- 우리는 잔을 부딪치면서 웃고 웃고 떠들었다. 우리 두 사람 사이에 각별한 감정이 스쳐지나갔다. 나이키와 함께했던 운동선수들과 나 사이는 항상 이랬다. 이신전심, 동지애, 연대의 감정이었다. 비록 순간적으로 느끼는 감정이지만, 내가 그들을 만날 때마다 늘 찾아오는 감정이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1962년 세계 여행을 떠났을 때 찾고자 했던 것이다. (p.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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