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예술 예찬

체스 여왕을 사로잡은 술은 무엇이었을까? (알고보면 더 재미있는 퀸스갬빗 속 술 이야기)

by 오베라 2020. 12. 13.

 

넷플릭스 드라마 <퀸스 갬빗>이 화제입니다.  

퀸스갬빗이 인기 많은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죠. 주인공인 안야 테일러 조이의 매력은 물론이거니와, 체스라는 소재와 극을 전개하는 서사 자체도 흥미롭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다양한 방면에서의 디테일도 예사롭지 않은데요. 저는 등장인물들이 마시는 술을 통해 퀸스갬빗이 얼마나 디테일적으로 훌륭한 드라마인지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할 이야기는 약간의 스포가 있으니, 아직 보지 못한 분들은 그 점을 감안하시거나 드라마 정주행 이후에 봐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먼저 퀸스갬빗의 주된 배경인 1960년대 중반의 미국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를 해볼게요. 이 때는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난지 약 이십 년이 지난 시점이자, 많은 사랑을 받았던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암살 당한 직후이기도 해요. 케네디가 암살당하기 석 달 전에는 마틴 루터 킹이 'I have a dream'으로 시작하는 유명한 연설을 하기도 했답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각종 차별이 가득했던 시절이란 걸 알 수 있어요. 체스판도 마찬가지였어요. 드라마만 보더라도 체스 플레이어 중 흑인은 없었고, 여성 또한 흔하지 않았죠. 주인공 베스 하먼 역시 처음 체스 대회에 도전했을 때는 무시 당했답니다.

 

 

한편, 이 때는 전세계적으로 다양하게 술을 마시는 시대이기도 했죠. 그래서 퀸스갬빗에도 애주가들이 많이 등장했답니다.

 

(좌) 하먼, (우) 앨마 휘틀리 부인

 

대표적으로 베스 하먼과 그녀의 양엄마인 앨마 휘틀리 부인이 있죠. 주인공과 주인공 엄마가 해당되니, 더이상 말할 필요가 없죠. 사실 하먼은 양엄마에게 술을 배웠습니다.

 

 

엄마는 미성년이던 그녀에게 처음으로 술을 건넸어요. 그것도 여러 명이 함께 타고 있던 비행기에서였죠. 때는 크리스마스 즈음이라 기분이 좋았던지 자신이 마시던 칵테일을 잠시 건넵니다.

 

 

하먼은 주저하지 않고 받아들고 한 모금 마신 다음 이렇게 말합니다.

"좋네요. 마티니인가요?"

 

 

그러자 휘틀리 부인은 대답하죠.

"깁슨. 양파가 올리브보다 좀 더 우아한 것 같아서."

너무 멋진 대사 아닌가요. 아마도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겉모습만 보고 마티니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저도 휘틀리 부인이 대답하기 전까지만 해도 마티니인 줄 알았어요.

 

깁슨
(좌) 깁슨, (우) 마티니

 

퀸스갬빗에서 가장 핵심적인 술이 바로 깁슨인데요. 이 칵테일에 대해 잠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깁슨은 우리가 잘 아는 마티니와 큰 차이가 없어요. 진과 드라이 버무스라는 재료가 들어간다는 점이 공통적이어서 겉으로만 보면 마티니로 보여요.

 

 

절인 양파 (우리나라에서 파는 양파와 조금 다릅니다)

 

다만, 한 가지 차이가 있죠. 올리브가 가니쉬로 들어가는 마티니와 달리, 깁슨은 절인 양파가 들어갑니다. 그래서 엄마도 하먼에게 그렇게 이야기 한 것이죠.

 

아니, 과자도 아니고 절인 양파라니

 

그나저나 절인 양파라고요? 아니 칵테일에 양파라니 상상하기도 어려우시죠.

 

찰스 데이나 깁슨의 일러스트 'Gibson girl (깁슨 걸)'

 

깁슨이 탄생한 에피소드를 보시면 이해가 되실지도 모릅니다.

1) 가장 유력한 설은 당대 전설적인 일러스트레이터인 찰스 데이나 깁슨(Charles Dana Gibson)의 이름을 통해 따왔다는 건데요. 뉴욕 맨해튼 어떤 바의 단골이던 그는 바텐더인 찰리 코널리에게 새로운 버전의 마티니를 요청했고, 찰리는 임기응변으로 미니 양파를 넣어서 서브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칵테일이 인기를 얻자 그의 이름을 따서 깁슨이라고 지었다고 해요.

2) 다른 설은 1898년에 샌프란시스코의 바 보헤미안 클럽에서 월터 디케이 깁슨의 요청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평소에 술이 약했던 그는 손님을 접대해야하는 자리에서 잔에 물을 따르고 마티니와 구분하기 위해 올리브 대신 양파를 넣었다고 합니다.

두 가지 에피소드 모두 깁슨이 마티니의 대안적인 칵테일이란 것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최초의 바텐더 책이라고 볼 수 있는 <Bartender's guide>

 

깁슨의 레시피는 간단합니다. 미국 바텐더의 스승격인 제리 토마스의 레시피는 진은 탱커레이, 프렌치 버무스는 노일리 프랏을 사용하여 1:1로 섞는다고 합니다. 아마도 현대에 이를수록 진의 비중이 점점 높아져서 드라이한 칵테일이 되었을 것 같네요.

 

 

그렇다면, 앨마 휘틀리 부인은 유명한 마티니도 아니고 왜 깁슨을 마셨을까요? 아마도 "양파가 올리브보다 좀 더 우아한 것 같아서." 라는 대사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녀는 드라마에서 종종 피아노를 칩니다. 하먼과 함께 사는 집에서는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 1번>과 <그노시엔느 1번>을 치죠. 멕시코 시티 호텔에서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는 장면을 보면 프로 수준으로 친다는 걸 알 수 있어요.

 

 

그렇습니다. 그녀는 클래식을 사랑하는 우아한 여성이란 걸 알 수 있어요. 오랫동안 펜팔을 나누던 남자를 만나러 국경을 넘어가는 낭만주의자이기도 하죠. 동시에 당대의 성차별적인 사회 안에서 자신의 꿈을 펼치지 못한 사람이었어요. 하먼이 꿈을 펼칠 수 있도록 그녀가 열심히 지지해준 이유가 다 있었죠. 하먼의 학교 땡땡이는 모두 휘틀리 부인 덕분이에요.

 

 

깁슨은 이 장면 외에도 퀸스갬빗 내에서 수차례 등장합니다. 단 둘이 레스토랑에 있을 때도, 그리고 멕시코 시티에서 홀로 돌아오는 비행기 내에서도 등장해요. 하먼은 온더락스로 약하게 마시며 죽은 엄마를 조용히 추모합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이렇게 기억하면 되지 않을까요. 깁슨은 우아한 칵테일이라고. 깁슨은 미국드라마 <매드맨>에 등장하는 것 빼고는 상대적으로 덜 조명받는 칵테일이었는데, 퀸스갬빗 덕분에 찾는 사람들이 다시 많아질 것 같아요. 스콧 프랭크 감독은 아마도 칵테일을 사랑하는 사람일 겁니다.

 

 

다음으로는 하먼의 세계 대회 결승전 컨디션을 망쳐버린 술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프랑스의 술 파스티스 예요. 하먼은 첫 세계 대회를 위해 파리에 갑니다. 하나하나 격파하며 마침내 꿈에 그리던 결승전에 이르죠. 그런데 결승전 전날에 뉴욕에서 만났던 모델 클레오로부터 전화가 와요. 그녀 호텔 1층에 있다고 말합니다. 뭐, 한 잔 하자는 소리죠.

 

 

하먼은 처음에 거절하지만 결국 지하에 있는 바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클레오가 마시던 파스티스를 따라 마시기 시작합니다. "딱 한 잔만" 이라고 외치지만, 공허한 메아리란 걸 시청자들은 이미 알고 있죠.

 

제대로 큰일 났음

 

그렇게 한 잔 두 잔 계속 마시다가, 어느새 눈을 뜨니 욕조 안이고 이미 다음날 아침이었어요. 결승전은 이미 열렸으며, 상대방인 챔피언 보르고프가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죠.

 

자, 파스티스 한 잔 해 

 

이렇게 하먼을 역대급으로 취하게 만든 파스티스는 어떤 술일까요? 파스티스는 압생트가 금지된 이후인 1932년에 폴 리카(Pernod Ricard의 그 Ricard)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아니스향이 나고 루쉬 효과마저 발생하기에 압생트의 대안으로 여겨졌습니다. 대신 압생트의 주재료인 대쑥이 들어가지 않은 점은 명확한 차이점이죠.

 

(좌) 파스티스, (우) 압생트

 

더군다나 40도 밖에 안되기 때문에 (압생트 75도까지 하는것 아시죠?) 물을 섞으면 매우 부드럽게 마실 수 있다는 특징도 있습니다.

(상단의 이미지에서 클레오가 물 붓는 디테일을 봐주세요)

 

 

2007년도 자료에 의하면 파스티스는 매년 1억 3천만 리터가 판매된다고 합니다. 프랑스 인구 당 10리터 정도 마시는 셈이라고 해요. 그래서 클레오가 이렇게 소개했죠. "아주 파리답고, 평범하지." 다른 술도 아니고, 중독으로 유명했던 압생트와 가장 유사한 프랑스 술을 이 장면에 집어넣은 것 자체도 엄청나게 날카로운 디테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외에도 퀸스 갬빗에는 다양한 술들이 곳곳에서 등장합니다. 해외 원정을 떠날 때마다 각 나라를 대표하는 술들이 등장해요. 

 

멕시칼리 비어
캡처 이미지와 라벨 디자인이 조금 다르지만, 자세히 보면 로고는 같습니다

 

프랑스의 파스티스 뿐만 아니라, 멕시코에서는 멕시칼리 비어(Maxicali beer)와 마르가리타 그리고 러시아에서는 보드카가 등장하죠.

 

 

미국에서 주로 마시는 맥주는 스쳐지나가는 라벨을 봤을 때 아마도 팹스트 블루 리본 비어(Pabst blue ribbon beer)인 것 같아요. 오히려 한 차례 등장하는 국민 맥주 버드와이저보다 자주 등장하는 점이 흥미롭네요. 하지만 공식 인스타그램과 위키피디아를 봤을 때 언급이 없는 걸로 봐서는 제 추측이 맞을 확률을 80% 정도로 보겠습니다. 

 

될성부른 원샷
베니야 좌절하지마

어쨌든 이 맥주도 상당히 자주 얼굴을 비춥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타운스와의 긴장 가득한 시간을 보낸 이후에 원샷을 하기도 하고요. 그 모습을 본 엄마가 말하죠. "not so fast" (이 때 하먼은 미성년자였어요.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 부터 알아본다.)

그 외에도 미국 챔피언 베니를 이기고 난 후 바에서 둘이 마실 때, 세계 챔피언 보르코프에게 처참히 깨지고 집에서 방탕한 시간을 보낼 때도 마십니다.

 

 

이렇게 퀸스갬빗에는 다양한 술들이 등장해요. 그리고 교훈도 하나 있죠. 술은 적당히 마셔야 한다는 것. 자신의 몸을 컨트롤 할 수 있을 때까지만 마셔야한다는 점이에요.

 

 

지금까지 퀸스갬빗에 등장하는 술을 통해, 이 드라마가 얼마나 디테일적으로 훌륭한지 알아봤습니다.

그럼 오늘도 풍요로운 음주 생활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