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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개인주의자

대장내시경을 위한 호캉스 1박 2일

by 오베라 2020. 8. 11.

 

살면서 마주치고 싶진 않지만, 언젠가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
군입대를 해야 한다거나, 찍먹의 지조를 잠시 외면한 채 부먹을 해야 한다거나, 부먹을 해야 한다거나 등.
(어쩌면 이 글을 봐야만 하는 순간도)

 

평화를 위한 해결책

 

나에겐 대장 내시경이 그랬다.

아니 세상에, 호스를 입 안에 깊숙이 넣는 위 내시경도 끔찍한데, 무려 뒤에 넣어야 한다니.
(가뜩이나 대학생 때 5만원인가 아끼겠다고 무수면 위 내시경을 받았다가 역대급으로 고통스러웠던 경험이 있음)  

상상도 하기 싫었다. 하지만 그런 내게도 피할 수 없는 순간이 다가왔다.

회사원처럼 건강 검진을 받을 수 없어서 스스로 건강 상태를 체크해야만 하는데, 어느새 삼십 대 중반이 되어 그 타이밍이 됐기 때문이다. 원래는 다른 친구와 함께 받기로 했으나, 친구는 예약을 실패한 관계로 '보호자 없이 + 함께 받는 이도 없이' 오로지 홀로 건강 검진을 하게 됐다.

인생 첫 대장 내시경을 말이다.

 

콸콸콸

 

검진 일정은 월요일 아침 7시 30분으로 결정 됐는데, 스케쥴이 정해지자마자 고민이 시작됐다.

'검진 당일, 집에서 출발해도 되는걸까?'

대장내시경 받기 전날부터 당일 새벽까지 먹어야만 하는 약의 악명은 자자하다.
약을 먹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장염 이상으로 폭포수처럼 콸콸콸 나온단다. 아니 무슨, 어느 정도 이길래.

그래서 오기를 부려봤다.
호텔 예약을 해버린 것이다.

 

 

월요일 출근길 지옥철에서 콸콸콸이 터질까 내심 두려웠고, 코로나로 인해 평소의 1/5 가격으로 호텔 방도 예약할 수 있으니 (그렇다면 호캉스...?) 일말의 고민도 없이 병원 근처로 바로 잡아버렸다. 무려 도보 7분 거리다. 아, 벌써 행복해... 

대장 내시경은 D-4부터 본격 준비 시작이다.
이 때부터 시간 순서로 실시간 상황을 기록했다.

 

 

D-7 ~ D-4

검진 7일 전에서 4일 전 사이에 약과 주의사항이 적힌 종이가 함께 배송된다.
먹지 말아야 할 것, 미리 준비해야 할 것들이 적혀있다.

문제는 먹지 말라는 것을 보는 순간 먹고 싶어진다는 것 

 

고명으로 올라간 김가루와 견과류는 덜어 달라고 해야했는데

 

D-4

이 날부터 먹을 것에 신경쓰기 시작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 때부터 죽을 먹기 시작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좀 후회된다.

정말 먹어야 할 타이밍에 죽이 물려서 힘들었다. ^_ㅜ
피할 음식들만 먹지 않고 있다가, 죽은 이틀 전부터 먹어도 충분하다.

 

D-1

12:00
몇 끼 연속 죽을 먹었더니 아무것도 안 들어가서 결국 마지막 끼니를 걸렀다.

15:00
이제부터 물만 복용 시작. 비도 내리고... 갑자기 먹고 싶은 음식들이 떠오르기 시작.
탕수육에 맥주, 김치찌개에 소주 먹고 싶다.

 

뭔가 호캉스 같고 좋네

19:30
호텔 체크인. 더블 베드룸으로 방을 잡았는데, 기대 이상으로 방이 깔끔하고 뷰가 좋았다. (을지로 시내 더 나아가 서울 성곽길까지 다 보임) 심지어 욕조까지 있었다. 일단 물을 받기 시작. (아, 집에 러쉬 배쓰밤 있는데)

 

 

 

(호텔에서의 기록은 그야말로 실시간)

 

명심하고 명심
안녕, 친구들

ㅅㅅ약도 정성스럽게 쉐킷쉐킷

완성본

19:50
설명서를 참고하며 크리쿨산 제조 시작. 나름 셰이킹을 좀 해본 터라 쉐킷쉐킷을 열심해 해보았다. 너무 격정적으로 흔들다가 마지막에 뭐한거니

 

 

20:00
크리쿨산 250ml 복용. 레모나를 물에 탄 맛. 비타민C가 들어가서 그런가. 생각보다 맛있다...!
간판만 봤을 때 맛을 1도 기대할 수 없는 식당에 어쩔 수 없이 들어갔는데, 의외로 밥이 먹을 만한 느낌이랄까.

 

 

20:15
15-20분 간격으로 250ml씩 먹으라고 하기에, 또다시 복용. 여전히 맛있음.

 

 

20:35
250ml 추가 복용. 맛은 있으나... 슬슬 물림. 물로써 배를 채우기 시작.

 

 

21:00
처음 먹은 뒤 한 시간 경과. 250ml 추가 복용. 총 1리터 완료. 맛은 여전히 있으나... 배가 불러짐. 음식 생각 사라짐. 배에서 뭔가 꾸룩꾸룩 신호가 오는 것 같음.

 

탕에 들어가서 미드 보기 (이때까지만 해도 그저 행복했다)

 

22:14
한 시간 동안 물 300ml 정도 더 마심. 탕에 들어가 뜨끈한 물에 몸을 풀어주며, 요즘 한창 몰입 중인 미드 보기 시작.

그러다가 드디어 첫 번째 신호. 그것도 연속으로 세 번.

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아!!!!!

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소감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와우!' 였다.
나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폭포수처럼 콸콸콸
장염이 복통을 동반했다면, 이것은 배는 전혀 아프지 않고 약의 효과가 톡톡이 느껴졌다.

(정신 건강을 위해 이제부터는 간략하게 상황 설명을 해본다)

22:37
두 번째 신호. 콸콸콸

22:52
세 번째 신호. 짧게 콸콸콸 (묽어짐)

23:10
네 번째 신호. 짧게 콸콸콸 (묽어짐)

23:27
다섯 번째 신호. 짧게 콸콸콸 (많이 투명해짐)

 

 

 

 

크리쿨산을 먹은 뒤 약 한 시간 뒤 부터 한 시간 동안 다섯 차례 변기행 + 일곱 번 콸콸콸

 

책을 읽을 틈이 없었다

 

자정부터 새벽 네시까지 취침 후 다시 기상
다행히도 이 때는 아무런 신호 없이 푹 잤음. (이미 꽤 많은 양을 배출한 터라 몸에 힘이 빠져 잠이 잘 올 수 밖에 없다)

 

04:00
크리쿨산 새로 제조한 뒤 250ml 복용.

04:12
여섯 번째 신호.
다시 짧게 콸콸콸 (많이 투명해짐)

04:23
250ml 추가 복용.

04:40
250ml 추가 복용. 슬슬 물리기 시작. 맛을 떠나서 그냥 먹기 싫어짐.

05:00
마지막 250ml 복용 완료. 너무 배불러짐.

 

 

05:05
파마시메티콘액 2포를 넣은 최종 1리터 제조 완료.
맛은 뭐랄까, 투명한 부루펜을 소량 넣은 물 맛.
물로 배 채울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달음.

05:21
일곱 번째 신호.
ㅎ ㅏ, 이 짓도 이제 버거워짐.

05:28
여덟 번째 신호.
비데를 사용할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하다.
비데가 있는 호텔에 예약했던 나에게 무한 칭찬.

05:33
아홉 번째 신호.

05:46
열 번째 신호.

05:51
열한 번째 신호.
비데야 사랑해...

05:59
열두 번째 신호.

06:07
열세 번째 신호.

06:14
열네 번째 신호.
외형만 보면 소변과 구분이 안 가기 시작.

06:25
열다섯 번째 신호.
비데도 아파짐. 비데의 강도를 가장 약하게 변경. 

06:44
열여섯 번째 신호.
제발 마지막...!

06:50
17

 

체크 아웃 하려는 순간, 갑자기 신호가 온 줄 알고 깜놀했었다

 

07:10
열일곱 번째를 마지막으로 일단 끝.
기분이 아주 말끔하다기 보다는, 언제 또 다음 신호가 올지 몰라 조금은 불안한 채로 체크 아웃 후 병원으로 출발.
만약 지옥철이었다면 불안함이 더 컸을 것이다. 예약하길 정말 잘했어 ^_ㅜ

정리해보면, 내 경우 콸콸콸 하이라이트는 밤보다는 새벽이었다.
4시부터 마셔서 7시에 출발하면 되니깐, 잠시라도 다시 잘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었는데 쉴 틈이 없었다.

 

 

07:17
검진 센터 도착.
말로만 듣던 뒤가 뚫린 바지를 입고 검진을 받았다. 뭔가 시원하지만, 조신하게 움직여야 할 것 같은 기분.

약 세 시간 동안 다양한 검진을 받았고, 거의 막바지에 위내시경과 대장내시경을 동시에 받았다.
수면 위 내시경을 받았을 때처럼 옆으로 쭈그려 누워 프로포폴이 들어온 걸 지켜보다가 다시 눈을 떠보니 어느새 끝.

 

 

너무 먹고 싶었던 하동관 스무공을 완탕하며 첫 대장 내시경을 마무리했다.

 

다음에도 대장 내시경을 받는다면 이번처럼 근처의 호텔을 알아볼 것 같다. 
1) 물리적 거리의 가까움에 대한 안도감 + 2) 비데의 부드러움 + 3) 대장내시경 준비 -> 호캉스라는 프레임 변화까지
매우 만족한 결정이었음.

단, 넓은 방으로 예약하지 않을 것이라면 꼭 혼자 묵을 것을 추천.
지난 밤 동안의 내 모습을 누군가와 공유했더라면 서로가... 꽤나... 부끄러웠을... 것 같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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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2

  • Jiy 2020.08.11 16:39

    마침 딱 다음주에 첫 내시경이라 매우 궁금했는데 ㅋㅋㅋㅋ 감사합니다😂😂 이제 슬슬 마음의 준비를..
    답글

  • 연기햄 2020.08.11 18:01

    좋은 포스팅 잘 보구 공감하고 갑니당~
    답글

  • K 2020.08.11 18:05

    고생하셨네요! 저도 대장내시경은 한번도 안 받아봐서 이번엔 꼭 검진받아야 하는데....후기를 보니 미룰수만 있다면 최대한 미루고 싶은 심정입니다ㅋㅋㅋ무려 열번이 넘는 부아아아아악 이라니....벌써부터 두렵네요 ㄷ ㄷ ㄷ
    답글

  • 따뜻한일상&독서 2020.08.11 20:05

    대장내시경의 경험을 이렇게나 즐겁게 써주시다니요 ㅎㅎㅎ
    저도 지금 지나고 생각해보면
    정말 인상적인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데야 고마워 . 콸콸콸 ㅋㅋㅋㅋ
    이것은 글만 읽어도 머리속에 훤히 그려지네요^^
    답글

    • 오베라 2020.08.11 22:37 신고

      생각의 프레임이 중요한 것 같아요 ㅎㅎ 저는 다음 대장 내시경도 즐거운 마음으로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

  • 티지킴 2020.08.12 11:43

    인성이 글 솜씨가 점점 늘어가는구나 나는 매년받는데 네가 먹었던 약은 5년 전에 비하면 정말 대폭 개선이 된거란다 ㅎㅎ
    답글

  • 뚜야 2020.08.12 16:49

    책에도 쓰시는 술술 잘읽히는 문체를 여기서도 사용해주시니 대장 내시경 받아보지도 않았는데 받아본 느낌으로 두려워진 제 미래ㅠㅠ......저는 위내시경만 수면으로 했을때도 힘들었는데 동시에 두가지 내시경을 다 끝내셨다니 부럽습니당 리얼 후기 잘읽고 갑니다....여태 읽어본 후기들중 제일 리얼했어요
    답글

    • 오베라 2020.08.12 19:56 신고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가 제 신조 중 하나인데, 기왕 호캉스 하시면 도전하시는 것으로 :) 재밌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